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3 대전 엑스포 (문단 편집) == 그 외 == * 대전엑스포는 이름은 엑스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테마파크]]에 가깝다. 당시의 엑스포 내에는 손님들이 탑승하여 즐길 수 있는 어트랙션, 이른바 놀이기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4D 씨어터와 [[다크라이드]][* 정보통신관의 궤도전시장. 한국의 유일한 옴니무버 다크라이드였다.], 애니매트로닉스 극장까지 운영했다. 반면 대전엑스포가 내놓은 [[놀이공원]]은 [[꿈돌이랜드]]라고 따로 있었지만 퀄리티는 낮은 편이었고 2012년에 철거되었다. 꿈돌이랜드 위치에는 기초과학연구원 생활관 이외에는 아직 공터로 남은 공간이 많은데, 과거 블랙홀특급이라는 롤러코스터 선로가 통과했던 터널 구조물이 아직도 남아있어 과거 꿈돌이랜드가 있었음을 증명하고있다. * 엑스포 개최 시기를 포함한 1993년 여름은 1980년과 함께 [[https://pgr21.com/humor/331809|한반도 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서늘했던 여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여름에 [[이상 저온]]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게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1994년 폭염|이듬해에는 그야말로 열지옥이 펼쳐졌다]]. * 당시 상설전시구역은 [[월트 디즈니 월드]]의 EPCOT Center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체험형 영상물들도 그 업그레이드형들이 많았고, 각 대기업들이 경쟁심에 서로 첨단 어트랙션을 도입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EPCOT Center보다도 더 많은 첨단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폐막 후 관리 비용 문제가 커졌다. * 각 전시관의 내용물에 광고 기획사들이 깊이 관여하였다. 이전에는 그와 같은 전시관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각 전시관 건설을 ~~떠~~맡게 된 기업들은 결국 광고 기획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대전엑스포를 통해 축적된 이들의 경험치는 백화점 기타 상점의 상품 디스플레이의 고급화에 기여하였다. 즉, 오늘날 여러 상점들의 내부 인터리어/디스플레이는 대전 엑스포의 결과물이라는 것. * 당시 연예계에 첫 발을 들였던 [[씨름]] 선수 출신 [[강호동]]이 대전 엑스포 개막일 다음날인 1993년 8월 8일 행사장 내 놀이마당에서 '''8시간 동안 [[악수]] 많이 하기''' 부문으로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하기도 했다. 당시 엑스포 행사장의 하루 입장객이 20만 명일 정도로 인파가 엄청나서 기록 도전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데다, 중간 휴식 없이 거의 1초에 한 번씩 악수를 해야 기록 경신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체력도 요구되었는데, 강호동은 이미 5회씩이나 [[천하장사]]로 등극했던 씨름선수였고,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에 [[기네스북]] 기록 경신이 예측되었다. 결국 강호동은 무사히 제한 시간 8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28233명과 악수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http://capplus.khan.kr/546|기사 링크]] 참고로 이 기록은 이듬해에 바로 깨졌다. * 1993년 8월 10일에 [[한총련]] 국토순례단 소속 대학생 1백여 명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토록 하라고 촉구하는 대국민 서명을 벌이기 위해 서문과 남문을 통해 행사장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57명이 연행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81000329122008&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8-10&officeId=00032&pageNo=22&printNo=14833&publishType=00010|참고.]] * 1993년 8월 13일에 독일관에서 운영 식당 부채 문제로 인해 독일인 주방장 토마스 피카스키(당시 37세)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독일인 4명과 통역 도우미 1명을 인질로 잡고 흉기 소동을 일으켰고, 이에 공수단 1개 중대가 출동하여 두 시간 동안 대치하는 살벌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자칫하면, 대전 엑스포 흥행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던 것. 다행스럽게도 피의자 토마스 피카스키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당시 [[대전서부경찰서]] 박봉관 민원실장의 중재를 요청했고, 이에 박봉관 민원실장이 현장에 도착하여 흉기를 버리고, 투항하도록 설득하여 사건은 해결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노쓰바하 디터 독일관장은 박봉관 민원실장에게 기념 메달을 전달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http://www.daej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370945|참고.]] * 엑스포 전시장 내부를 돌아다닌 [[전기자동차]]는 한국전기연구소가 개발한 6인승 승합차 5대와, 기아자동차가 시설 참가한 [[기아 프라이드]](물론 전기로 움직인다.) 4대, [[기아 베스타]](이것도 전기!)[* 이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선보인 전적이 있다.] 6인승 오픈카 3대였다. * 한빛탑을 포함하여 볼거리가 풍부했던 몇몇 전시관들은 엑스포 당시에 관람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개장 후 30분만 늦게 가도 2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우주탐험관 같이 인기가 매우 좋았던 체험관의 경우 7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 각 전시관의 어트랙션들의 경우 외국의 기술을 수입해 온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국민 교육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일단 엑스포라는 행사 자체가 한국 자랑이 아니라 세계의 문명을 전시한다는 취지로 개최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번지수 잘못 잡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각 전시관을 건설하는 데 기업별로 200억~300억을 투자하였다. 폐막 후 신문 기사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경우 우주탐험관 방문자 1인당 3만 원의 투자(라고 쓰고 손실이라고 읽는다.)를 한 셈이라고 한다. * 전시관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도 버스 한 대에 전시품을 채워서 참가하였다. 사실 이때의 한국이동통신은 한국통신(현 [[KT]])의 자회사였다. 모회사의 전시관인 정보통신관이 이미 있었고 그 전시관에는 이동통신과 관련된 것도 있었으니 따로 전시관을 낼 필요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지금 SK텔레콤의 위상이라면 버스 한 대로 때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이때는 [[경부고속철도]] 차량 최종 선정 직전이었기 때문에 최종 후보였던 [[TGV]]와 [[인터시티익스프레스|ICE]]의 홍보 활동이 치열했다. 대전엑스포도 예외는 아니었고, 프랑스관에 가면 TGV의 목업과 홍보전시물을, 독일관에 가면 ICE의 목업과 홍보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25rSeJZfgM)]}}} || [[KBS 미디어|KBS 영상사업단]]에서 제작한 하이라이트 비디오에서는 [[장정진]] 성우가 해설을 맡았다. * 1993년 8월 16일에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51회에 엑스포 행사장이 주 배경으로 나왔다. [[https://tv.kakao.com/m/channel/3451259/cliplink/421505370|축약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imgnews2.naver.net/10000383508_59_20130918195706.jpg|type=w430_q80&width=100%]]}}} || 엑스포 기간에 [[추석]]이 끼는 바람에 귀성길과 엑스포 관람 차량이 겹쳐서 역대 최악의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대전이 무려 17시간이 소요되었다.''' 참고로 느린 기차의 대명사 격으로 쓰이는 비둘기호가 당시 서울-부산 소요 시간이 약 12시간이다. '''이 당시 비둘기호는 길 가다 선로 옆에 [[임시승강장|콘크리트 구조물]]만 있으면 다 정차했다 해도 될 정도로 느렸는데 이보다 짧은 거리인데도 약 5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10시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다음날 새벽 3시에 대전에 도착하는 것. 당연히 비둘기호는 진작에 부산에 도착했다.''' 다만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많이 없어서 영남권과 호남권, 충청권 모두 경부/중부고속도로의 서울-대전 구간을 함께 이용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로, 이후에 논산천안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고속도로가 많이 생기고 고속철도와 저가 항공사들이 생기는 등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이런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 대회 준비 과정에서 700여명의 엑스포 [[도우미]]를 선발하여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었다. 비록 의미는 다소 변질되었으나, 오늘날 흔히 쓰는 도우미라는 단어의 시초가 이것이다. 도우미라는 단어로 인해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에서 둘째 며느리의 배역명 도우미([[김희정(1970)|김희정]] 분)가 탄생했다. [[배우]] [[채시라]]가 명예 도우미로 대전 엑스포 [[홍보대사]]로 활약했다. 도우미 선발기준은 키 160cm 이상, 나이 만 18세 이상(1975년 이전 출생자)~만 30세 이하(1963년 이후 출생자)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미혼''' 여성이 해당되며 [[스튜어디스]]에 준한 규정을 적용해 선발했다. 폐막 후 이들은 특기를 살려 스튜어디스,[* 선발 방식이 동일해서 도우미 출신들은 바로 특채되었다.] [[아나운서]], [[MC]], 예절 강사 등이 되거나 [[주부]]가 됐고, 2005년에 일부 도우미 출신 100여 명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963108|'93대전엑스포 도우미동우회' 결성을 통해]] 재결합하여 10여년 간 대전사이언스페스티벌 등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활발히 했다가, 현재는 자연 해체되어 대전 지역 모임만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8/20/2006082070426.html|조선일보 기사]],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2085|충청투데이 기사]]) * 행사장에서 북동쪽으로 약 3~4km 떨어져 있는 [[전민동]]에 '[[엑스포아파트|엑스포타운]]'이라는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 엑스포 당시 행사 요원 숙소 겸 국내외 대전 엑스포 방문객의 [[숙박시설]]로 썼다. 또한 엑스포타운은 '첨단 아파트'[* 그 당시 파격적이었던 [[비디오폰]], 홈 오토메이션 등을 각 세대별로 설치하였기에 첨단 아파트라고 했다. ]라고 내세웠던 대전 엑스포 출품작이다. 엑스포타운은 외국 기업이 설계하고, 국내 유명 건설사([[대우그룹|대우]]([[대우건설]]), [[롯데건설]],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s-2.1.1|삼성물산 건설부문]]),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들이 시공하였다. 엑스포가 끝난 이후에는 [[1994년]] 2월에 '엑스포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미리 분양을 받아둔 일반인들이 입주를 시작하였고, 엑스포타운은 현재 평범한 대단지 아파트이다. * 당시의 [[고속도로/대한민국|고속도로]]는 [[톨게이트]] 진입 시 자신의 목적 톨게이트를 직접 말하여 표를 받는 시스템이었다. 엑스포 당시 [[북대전IC|톨게이트가 신설]]되어 각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전 엑스포 한 장 주세요~" 하면 대전 엑스포 톨게이트 티켓을 검표원이 직접 주었다. 이후에는 통행권으로 바뀌었고, [[하이패스]]가 도입됨에 따라 요금소를 무정차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 전시장을 도는 [[모노레일]]과 [[곤돌라]]가 있었다. 곤돌라는 위에 있는 사진들에서도 보이는 대로이고, 모노레일은 전시장을 빙 도는 [[순환선]]이었다. 역들 중 은하수역이 세계관 구역에 있었는데, 폐막 이후에는 다 철수한 세계관 구역만 휑뎅그렁하니 빈땅이어서 은하수역에 정차하면 꽤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다가 적자로 운행이 중지되어 2000년 경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모노레일이 먼저 철거되었으며 곤돌라는 몇 년 간 더 방치되다가 엑스포 재개발 사업 직전에서야 비로소 철거되었다. 곤돌라의 양 끝 탑승장이 있던 곳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과 대전교통문화연수원 본관과 야외체험장 사이의 위치였다. * 서울 말고 대전 엑스포에도 독일에서 기증한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엑스포 당시 독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엑스포가 끝난 이후에도 공원에 전시 중이었다.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이 워낙에 큰 파장을 일으켜서 그렇지, 대전의 베를린 장벽도 무개념한 사람들의 [[낙서]]로 인한 훼손이 심했다. 결국 해당 조각은 철거되었다. * 당시 일반 입장권이 7000원이었다. 영화 티켓도 14,000원씩 받는 지금 생각하면 싸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과자 가격이 100원대, 자장면 한 그릇이 2천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비싼 편이었다. 이 당시 식당에서 파는 [[백반]] 1인분이 1500원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2020년 현재 물가로 환산하자면 3만 원쯤 된다. * 개최 기간 동안 [[KBS]]에서 소출력 방송인 '엑스포 FM 방송'을 운영했었다. 주파수 90.5MHz로 방송되었으며 하루 15시간 방송되어 [[KBS 2FM]] 프로그램 8시간[* 현재까지도 KBS 2FM은 대전을 비롯한 비수도권에 송출하지 않고 대전 지역에서는 98.5MHz와 102.1MHz([[청주시]])로 1FM과 2FM을 합친 단일 채널로 운영하여 2FM의 일부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이후 2001년 이후 2FM의 광고 방송 시작으로 [[굿모닝 팝스]]를 제외하고 1FM을 편성하여 2FM의 프로그램을 라디오로 들을 수 없었다. 이후 DMB인 [[U-KBS MUSIC]]이 2FM을 릴레이하여 DMB로 들을 수 있고 2016년부터 [[KBS 제2라디오]]의 일부 시간대에 방송하고 있다.] 자체 프로그램 7시간을 편성했다. 엑스포 FM 방송은 엑스포가 폐막된 뒤 폐국되었으며 이후 이 주파수는 [[대전국악방송]]이 쓰고 있다.[* 당시 국가적으로 밀어주던 행사들은 이런 전용 라디오 방송이나 기간한정 인쇄 매체 등도 완비되어 있었다. 1991년 보이스카우트 [[세계 잼버리]] 때도 [[일간지|일간신문]](!)이 찍혀나왔고, 2000년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 때는 이 기간 동안 KBS에서 영어 라디오 방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이 기능은 [[TBS]](서울)의 [[영어방송]]과 [[TBN]](제주)의 중국어 방송으로 넘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